우즈뮤즈

왜 "맥주" 하면 최고는 "독일"일까? 본문

음식 정보 스토리

왜 "맥주" 하면 최고는 "독일"일까?

우즈뮤즈 2021. 7. 10. 16:23

 

맥주의 역사는 에일과 라거 그리고 영국과 독일의 중심으로 전개된다.
맥주의 어원은 “마신다”는 의미의 라틴어 “비베레(Bibere)이다

맥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오리엔탈시대(약 6,000년~7,000년전)에 농경생활을

시작한 슈메르인들이 보리에 수분을 더해 발아시켜 맥아 빵을 만들었다.

당분이 많은 맥아 빵을 부수어 물과 섞으면 발효한 고대 맥주가 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맥주는 매우 귀한 술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와인보다 급이 떨어지는 술로 여겨졌는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인이 맥주를 마시는 이유는 단지 이집트에는

포도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했다.

로마에서는 맥주를 불치병을 유발하는

이집트의 차갑고 탁한 음료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럽 남쪽에서는 맥주를 매우 형편없는 술이라고 인식이 강했다.

하디만 유럽 북쪽의 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오래전부터 

특이한 형태의 맥주가 발전해오고 있었다.

고대 잉글랜드는 야생 벌꿀이 풍부했고 토착 '켈트인'들은 이를 발효시킨

'미드'라는 술을 많이 마셨는데 인구가 늘어나고 삼림이 벌채도며

야생 벌꿀이 점차 부족해지게 되었다.

거기다 벌꿀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귀중한 감료였기에 벌꿀 주

'미드'의 제조는 더욱 어려워졌고 이에 켈트인들은 꿀의 대용품으로 찾아낸 것이

당분을 함유하고 있는 발아시킨 곡물이었다.

곡물을 섞은 새로운 벌 꿀주를 만들어냈지만 그 맛은 

순수한 벌꿀로만 만든 미드에 비해 맛이 훨씬 떨어졌고 

곡물이 섞인 미드는 일반 서민을 위한 술,

원조 미드는 상류층을 위한 술이 되었다. 그리고 

이 두 미드를 구별하는 말이 필요했다

이때 곡물이 섞인 미드를 '에일'이라 부르게 된다

이후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게르만족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597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의 새로운 이민족에게

그레고리우스 1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수도사들을 파견하는데 이때

로마에서는 와인을 마셨던 수도사들은 유럽의 북쪽 잉글랜드는 

포도 재배가 불가능한 고시라 와인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은 당시 거리에서 사람들이 마시던 에일을

양조해 마시기 시작했다.

이것이 수도원 맥주의 시작이었다.

8세기가 되면 게르만 민족을 통일하여 로마 교황으로부터 관을 받아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까지 즉위하는 '카롤루스 대제'가 등장한다.

카롤루스에게 황제의관을 씌워주는 교황 레오3세

그는 맥주는 질보다 양이다 라며 큰 잔으로 맥주를 마시던

맥주를 각별히 사랑한 인물이었고 따라서

'저급한 술'이라며 로마인들에게 천대받던 맥주는 

게르만인의 자랑스러운 술로 인정받게 된다.

와인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술로 자리 잡게 된 맥주는 중세를 거치며

수도원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세 유럽에서는 당시 최고 두뇌 집단이었던 '수도사'들은 

원료를 계량화하고 여러 시험들을 통해 맥주 양조를 체계화했으며

거기다 교양이 뛰어났던 이들은 고문서를 해독하여 맥주 양조 기술과 비법을 찾아내

품질이 뛰어난 맥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는 일반인들이 만든 맥주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맛이 좋았고

이를 마신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지금 맥주의 독특한 쓴맛과 향을 내는 '홉'이란 것이 사용된 것도 '수도원 맥주'에서 시작되었다.

'홉'이 사용되기 이전에도 맥주의 맛과 향을 내기 위하 다양한 약초와 향신료들을 사용했는데

이것을 그루트라고 했다.

생강, 호두나무 열매, 감초, 꽃, 뿌리 등 다양한 재료들로 만든 것이 "그루트 맥주"였다

맥주의 역사에 있어서 '북독일'과 '남독일'은 완전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일단 '남독일'의 맥주 맛은 너무 구렸다고 한다.

12~15세기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동맹'에 가입하고 왕성한 해외 무역 활동을 벌였는데 

이때 맥주는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고 북독일 수공업자들의 조직

"길드"에서 만든 뛰어난 맛의 '에일'은 유럽 전역에서 호평받을 정도였다.

한편 '남독일'에서는 맥주 맛이 너무 별로여서 상류층들은 

북독일의 맥주를 수입해서 마셨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따라서 남 독일인 들은 맥주의 품질을 높이 자라는 답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맥주에 장난을 치는 부페한 제조 업자들이었다.

이런 부정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남독일에서는 다양한 노력을 하게 된다.

맥주를 시음하여 감정하는 '검사원'들을 두고 이들에게 

엄격한 행동 규범을 부여했는데 가령 시음 전날 밤에 과음을 해서는 안되고,

시음 당일에는 미각은 마비하는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되었다.

또한 질 나쁜 맥주를 만들어 판매한 사람은 그 맥주를 전부 마셔야하는 형벌까지 있었다.

이러한 '남독일'의 맥주 품질 향상을 위한 노력은 1516년 맥주 제조에는 오직 물, 보리, 홉만 사용해야 한다는

맥주순수령 공포까지 이어지고 이후 남독일 맥주의 품질은 북독일 맥주를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이무렵 남독일 바이에른에서는 우연히 획기적인 맥주가 탄생하였는데 바로 '저온 숙성 맥주'였다.

당시 유럽의 맥주는 상온에서 발효시키는 음료였고 따라서 균이 혼입되어 산패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날씨가 더운 남독일에서는 맥주의 산패 위험이 더욱 컸고 어쩔 수 없이 추운 겨울에 맥주를 만든 뒤

서늘한 동굴에 얼음을 채워 넣어  보관했다고 한다.

다시 맥주를 담글 수 있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동굴 속 맥주를 장기간 보관하였고 

이때 저온에서 천천히 숙성된 새로운 맥주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하면발효 맥주 라거'의 탄생이었다. 이는 기존의 에일을 만들어내는

'상면발효 효모'와 특성이 다른 저온에서 활동하는 '하면발효 효모'덕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효모'의 존재를 마예 모랐고 따라서 라거의 탄생은 정망 우연한 신의 선물이었다.

남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우연히 발견된 저온 숙성 맥주는 영국과 북독일의 에일에 비해서는

생소한 맥주였지만 이 새로운 맥주는 기존의 에일보다 맛이좋은 평가를 받으며 독일인의 맥주가 되었다.